그 간극은 어마어마해서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제이든이 겨우 집안에서 빠져나오려고 걸음을 내딛었을 때, 세라피나는 이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너무 빨랐기에 먼저 겨울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겨울에서 벗어난 세라피나는 더없이 빛나는 여름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짝이는 모래알과 부서지는 파도소리, 밝게 빛을 내는 햇살 아래서 부드러운 붉음과 선명한 청록이 자리를 잡고 그 무엇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겨울을 지낸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오랜 겨울은 아무리 강맹하다 한들 아름답게 빛나는 생명을 지게 할 수 없었으니. 그 과정을 봤던 제이든은 홀리듯이 세라피나의 뒷모습을 좇았다. 너와 함께 한 계절이 부족하게 느껴져서,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너는 이미 다른 계절로 사라져있을 것만 같아서.
조금 느렸던 탓일까, 제이든의 겨울은 세라피나의 겨울보다 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제이든은 그것이 자신의 겨울인줄 몰랐다. 강한 추위는 되려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것이 추운 것인지도 모르게 하여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겨울. 제이든의 겨울은 그런 겨울이었다. 감각이 마비되어 제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른 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그래서 그는 자신이 괜찮은 상태라고 인지했다. 그리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상태가 맞았다.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벗어나 그렇게 두려워하던 어른들을 단호하게 쳐내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 속에서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는 언급되지 않았다. 몰랐으니까.
"그게 괜찮은 게 될 순 없어, 제이든."
모두가 다행을 이야기 할 때, 혼자 그것을 다행이라 하지 못한 세라피나를 보며 제이든은 어떤 생각을 했던가. 그냥, 그냥, 괜찮은 거라고 하고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영영 묻어버린 채로 그것이 상처라고 생각도 못한 채로 지내는 것이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어째서 너는 이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무언가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확고하게 말하는 모습, 어릴 적에도 제 집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던 그 모습은 여전하게 남아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 때보다 더 부드러운 다정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 약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었다.
"지금은 흔들릴 수록 곤란해질테고..."
"흔들리면 잡아줄게."
앞서 간 여름이 겨울의 눈을 녹이는 것 같은 말이었다. 이상하지, 그 말에 유독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고야 말았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음에도... 아니, 이걸 친구에 대한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잡아준 손을 붙들어 잡고 놓고 싶어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정말 친구를 향한 마음이 맞을까? 제이든은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 세라피나의 손을 잡는다면 자신은 세라피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해서 잡아준 것이라면 한껏 불쌍하게 굴 의향이 있었고, 정말 막내나 아기 같아서 잡아준 것이라면 어리광이라도 부리며 그런 체 할 수도 있었다. 이미 앞서 나간 이를 붙잡으려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무겁고 어둔 욕망이 기어이 손을 뻗어 잡아 붙들어버린다. 비어버린 틈을 메꾸기라도 하듯 피어버린 욕망은 세라피나를 품에 안고 기대고 싶어했다. 작금의 상황은 그런 것에 치중하면 안되는 상황임에도, 그 온기가 없으면 기어이 겨울의 눈 속에 파묻힐 것만 같은 추위를 느끼고 말아서. 비어버린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너무나 두려워서.
그래서 제이든은 저를 끌어당긴 온기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저를 놓을 생각 없이 꽉 잡고 단단히 받쳐준 온기는 그가 감히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세라피나가 이렇게 행동할 줄 몰랐기에 그에 담겨있던 욕망도, 차가운 바람과 눈도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한여름의 햇빛을 마주한 것처럼. 제이든은 세라피나의 어깨에 기대어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안을 차지하던 욕망마저 녹이는데 제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이 다시 올라온다면 자신이 먼저 그것을 짓뭉개버리고 말 것이다. 여름을 맞이한 세라피나에게, 이 춥고 어둔 공간에서도 자신의 빛을 내는 세라피나에게 제멋대로 매달리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이 다정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제이든은 얌전하게 있기로 했다. 세라피나는 다정하고, 애정이 가득하며, 인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을 마냥 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하자고,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시린 겨울은 한결 나아질테니까. 지금처럼만, 그저 지금처럼만.
그런데 세라피나의 시선이 지금만 자신에게 있었던가?
문득 든 기시감이었다. 그러니까, 제이든이 자신의 겨울을 자각하기 전에도 세라피나는 제이든이 마법 세계에 방문했다가 돌아올 즘에 그에게 연락을 취하고는 했다. 일이 여유로운 날에는 아예 가게에 찾아온 상태였다. 그 때의 세라피나도 여름에 머물러있었다. 누구보다 빛날 준비를 하며, 자신의 일에 다시금 도전하는 그 때. 그 때에도 세라피나는 제이든의 일을 신경쓰고 제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쩌면 제이든보다 먼저 겨울이 찾아온 것을 안 사람은 세라피나였던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시린 겨울을 맞이했기에 제이든에게 똑같이 찾아온 겨울을 먼저 눈치챘던 것일지도. 그럼에도 세라피나는 제이든에게 자세한 부분을 묻지 않았다. 마치 제이든에게 있었던 일들을 제이든이 상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다녀왔냐는 다정한 물음에 제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다녀왔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 겨울 때문에 그 다정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구나. 세라피나는 어쩌면 한결 같이 같은 곳에 서서 제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된 순간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였다.
따스함으로 가득 찬 가게에 세라피나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여느 때처럼 제이든은 펄, 테이와 함께 세라피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보면 오랜 연인들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인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는 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세라피나의 배려였다. 이미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상처를 받은 제이든의 입장에서, 법적으로 묶이는 완전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세라피나를 사랑하고 사귀게 되기 전까지 제이든은 자신의 인생에 더 이상의 가족도, 그런 결혼 같은 문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귄 후에도 세라피나는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제이든을 위해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주었다. 세라피나는 제이든과의 관계에서 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에는 제이든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저 기다려주었다. 어떤 재촉도 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그 주제에 대해서 넘어가며. 그것은 제이든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제이든도 알았다. 그래서 제이든은 자신의 겨울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춥다. 하지만 세라피나는 여름에서 멈춰있었다.
이제서야 막 봄에 들어선 시점에서, 기나긴 겨울을 지나왔음에도 세라피나는 여전히 여름에서 제이든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이든의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세라피나는 여전히 여름이었다. 혹시라도 제이든이 추울까봐, 봄이 언제나 따뜻하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 세라피나는 느린 제이든이 함께 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저 따뜻한 시선을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을까.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은 마냥 순탄치는 않겠지만, 제이든은 언젠가 자신이 여름을 맞이하고 세라피나의 손을 잡을 때쯤에는, 그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