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여기에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해.”
소년이 소녀를 만난 것은 어느 날 밤이었다. 검푸른 밤하늘, 그 속에서 희게 빛나는 달과 별 사이로 드러난 부드럽고 오연한 붉은 빛. 바람결에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으면서도 그 길이 확고해보이는 녹음. 그래서였다. 본래라면 어떤 소통도 하지 않았을 소년이 소녀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은. 영원히 이곳에서 작은 어린 아이로 이 집을 지켜야하는데, 소녀가 갈 길이 너무 궁금해져서.
소녀의 얼굴이 작게 구겨진다. 그 구김마저도 조금 신비롭게 느껴져 바라보고 있으니 어린 아이 특유의 앳된 목소리가 불만에 가득 차 흘러나왔다. 창의 유리가 서로의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음에도 소녀의 목소리만은 어떻게 그렇게 또렷하게 들리던지.
“그건 부당하지 않아?”
“부당해?”
“부당해.”
“왜?”
“어른들은 나가잖아.”
그거야 어른이니까. 그 당연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바깥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대처할 능력이 충분했고, 소년은 아직 어렸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어른들은, 소년을 안전한 세계에 보호하기로 했다. 보호, 그래. 보호일 것이다. 소년이 집 안에 있어야만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했으니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제가 부당한 일을 당한 것 마냥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도, 방금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했음에도 화조차 나지 않는 소년 자신도.
“바보야, 왜 화도 안 내?”
“화가 나지 않아.”
“...바보.”
난 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잡아야하나? 하지만 손은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창문에 가로 막힌 손은 소녀에게 닿지 못했지만 둔탁한 소음을 일으켰다. 그것이 소녀에게도 들렸을까, 소녀는 내일 봐. 라는 입모양을 보이며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소년을 만나러 왔다. 매일 밤이 되면 달이 차오르고 별이 아롱거리며 비칠 때 쯤, 어른들 몰래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며 투덜거림과 함께 공허하고 조용하던 소년의 밤을 가득 채웠다. 유리창을 사이로, 소녀와 소년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년의 세계는 좁디 좁아 나눌 만한 말이 별로 없었음에도 소녀는 소년의 일상을 물었다. 그래서 소년은 매일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았다.
“있잖아, 제이든.”
“응, 세라피나.”
“나 이제 너 만나기 힘들 거야.”
“왜?”
“바빠질 것 같거든.”
소년이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그 때 이미 소녀로 인해 소년의 세계가 넓어졌기 때문이겠지. 하하, 웃음이 나왔다. 어린 날의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그 때 창문을 열고 나갔다면 세라피나와 조금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참 바보 같았다. 제이든은 제 손에 쥐어진 모란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 * *
그로부터 소년이 소녀를 다시 재회한 것은 무척이나 자란 이후였다. 소년의 몸은 작은 세계에 갇혀있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어린 아이는 바깥 세상을 보았기에 자라고 말았다. 어른들은 여전히 소년을 어린 아이 취급했지만 소년은 그것이 작은 세계에 남길 바라는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창문을 톡톡 두들겼다. 이런 약하디 약한 유리창은 이제 소년의 손에 쉽게 깨어지겠지.
그럼에도 깨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은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조금 엉망이 되어버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빛이 바랜 것은 아니었다. 바래고 만 것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계라는 것은 그렇다. 분명 안전한 것 같다가도 예기치 못한 상처를 만들어버린다. 작은 세계를 살던 소년도 그랬는데, 바깥을 사는 소녀에게 그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녕, 제이든.”
“안녕, 세라피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에 소년은 창문에 손을 대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쳐버린 듯한 웃음소리는 성숙해져 있었고, 힘이 없는 손은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보였다.
“있잖아.”
“응, 말해줘.”
“나도 거기서 살까?”
영원히 바깥을 보지 말고, 어린 아이로. 그 안에서만 말이야.
소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린 아이로 있어야 하는 이 세계가 분명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작은 세계를 부정하고 소년을 자라게 만든 이는 소녀임에도, 소녀는 이 작은 세계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큰 상처를 입을 만한 커다란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소년이 계속 이곳에 남아있었으니까.
이 작은 세계는 안온한 대피처가 아니다.
소년은 여전히 유리창을 깨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이 있었지만, 지금 이 유리창을 깨고 바깥으로 나간다면 창 건너 세계에 있는 소녀가 다칠 테니까. 소년은 소녀에게 배운 상냥함을 담아 창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잠겨 있지 않은 창문은 쉽게 열렸고,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았다. 소년의 몸이 작은 세계의 바깥으로 조금 삐져나오자 소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부당해.”
“어?”
“날 어른으로 만든 건 너잖아.”
내가 이 세계로 나오고 싶도록 만든 사람은 너잖아, 세라피나. 소년은 웃었다. 나를 어른으로 만들고 너만 어린 아이로 남는 것은 부당해. 그러니까 내가 이 곳에서 나갈께. 이곳은 결코 안온함이 될 수 없어. 어린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가 넓어지고 어른이 된다. 작은 세계에 몸을 욱여 넣어봐야 그것은 스스로의 고통으로 번질 뿐이다.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당혹, 의아함, 놀람, 약간의 억울함. 온갖 감정이 혼재되어있는 표정을 바라보며 소년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소년은 제법 막무가내인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러면 소녀가 당황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소년은 작은 세계를 버리고 나온 것이니까.
“너 진심이야?”
“응, 진심이야.”
소녀도 몰랐을 것이다. 설마하니 소년이 소녀를 보고 그 작은 세계를 버리고 나와버릴 줄이야.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내버리고 오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음, 역시 그 때 조금 무모하긴 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제이든은 모란 꽃다발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세라피나의 이름이 걸린 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를 했다.
이내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 * *
“안녕, 세라피나.”
“안녕, 제이든.”
제이든은 세라피나에게 모란 꽃다발을 내밀었다. 오늘 상을 받는 세라피나를 위해 미리 정성을 담아 준비한 꽃다발이었다. 서로에게 부당함을 말했던 둘은 결국 머무르려던 작은 세계를 버리고 함께 바깥으로 나와 어른이 되었다. 이미 그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작디 작은 세계에 머무르기엔 이미 넓은 세계를 알아버리고 말아서.
꽃다발을 만지던 세라피나가 제이든에게 물음을 던졌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네가 상 받는 날?”
“정말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여전히 자유롭게 나아갈 것 같은 녹음이 불만으로 물들었다. 설마 잊은 거야? 진짜로? 마치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아 제이든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세라피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게 되는 오늘, 세라피나는 그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보였다. 중간에 한 번 무너졌던 사람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정함과 당당함이 자리 잡은 어른이 되어 그런걸까?
제이든은 몸을 일으켜 세라피나의 발치로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세라피나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드레스와 정장이 스치는 특유의 사락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 새파란 눈동자가 어른이 된 세라피나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었다. 악의에 상처를 받아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으려고 했던 사람. 하지만 이제는 그 상처를 가다듬고 오롯이 다정을 담아낼 수 있게 된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의 곁에서 다정을 배우게 된 자신.
“아니야. 알아. 오늘은…”
소녀와 소년이 어른이 된 날.
함께 작은 세계를 빠져나온 날이었으니까.